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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충효록서(忠孝錄序)
忠孝錄序 東方無道學而圃隱爲之倡我 朝多節義而六臣爲之首尚論已定無容改評玉川趙氏四世忠孝事實既萃成一錄正鎭讀而歎曰多矣哉孝至於盡禮忠至於舍命有一於此足以範俗而垂世况四世一心既樹立之又穀似之綽楔 贈貤節惠爼豆之固其所也學士之碣相國之狀亦宜乎其累書不一書也然正鎭之所尤異者農隱副正協志於圃冶竹村龜川同死於六臣天之降性偏厚於趙氏耶何先後一大事而趙氏無不與聞也是亦無足異者道之興廢必有兆漸人事卽天意也方四公之時天將佑啓我一治大棐我民彝圃冶之倡學六臣之盡節謂之非天意可乎苟天非無意則趙氏之世濟其美亦何難矣昔元凱之族濟美於先而唐虞之治畢竟賴之趙氏四世豈可以古今不同而殊觀但元凱處其常故以身享當時之熙皥趙氏處其燮故以名裨後世之名敎脱不得古今氣數之厚薄是可追想於邑也遂忘僭題其卷端而歸之 幸州 奇正鎭 謹書 參判蘆沙 충효록서(忠孝錄序) 우리나라에는, 본래 도학(道學)이 없었는데, 포은 정몽주 선생이 처음 창명(倡明)하였고, 우리나라에 절의를 지킨 사람이 많아도 사육신이 그 우두머리가 된다는 의논은 이미 정해져서 고쳐 의논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옥천 조씨 四世의 충효 사실을 이미 모아 한 권의 책이 이루어졌는데, 나 정진(正鎭)이 읽고는 이렇게 반복하였다. 훌륭하다. 효는 예(禮)를 다하는 것이 지극하고, 충(忠)은 목숨을 버려 하는 것이 지극한데, 이를 한 가지만 갖추어도 족히 풍속에 모범이 되어 세상에 전해진다. 더군다나 四세가 한 마음으로 이미 충효를 수립하고 또 아름답게 이어서 정문(旌門)을 세우고 벼슬을 추증하여, 시호를 내려 제사하는 것은 의당해야 할 일이다. 학사(學士)의 비갈(碑碣)과 상국(相國)의 장문(狀文)은 의당 여러 번 써야지 한 번만 써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 정진이 더욱 기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농은 선생과 부정(副正)공이 포은·야은과 뜻을 같이 하였고, 죽촌(竹村)과 귀천(龜川)은 사육신과 함께 죽었으니, 하늘이 성품을 내릴 때 유독 조씨들에게만 치우쳐 후하게 하였다는 것인가. 어찌 앞뒤의 큰일에 조씨들만 모두 이름이 알려졌단 말인가? 그러나 이는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다. 도(道)가 일어나고 없어진 데는 반드시 조짐이 있게 마련이고 사람의 일은 바로 하늘의 뜻인 것이다. 바야흐로, 네 분의 시대에는 하늘이 장차 우리나라를 한번 잘 다스려 보려 하였고 크게 우리 백성들의 인륜을 떨치게 하려 하여 포은과 야은이 학문을 창도(倡導)하고 육신들이 절개를 다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하늘에 뜻이 없지 않다면 조씨들만이 훌륭한 일을 한 것 역시 어려울 게 무엇이겠는가? 옛날에 원개(元凱)의 겨레붙이가 미리 이룬 미덕이다. 당우(唐虞)의 치적을 이루는데 힘이 되었는데, 조씨 四세의 일을 시대가 다르다하여 어찌 다르게 보겠는가? 다만 원개는 평화로운 때 살아서 자신이 당시에 맑은 빛을 받았지만, 조씨는 변란의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후세의 명교(名敎)를 돕게 되었다. 이로 보아 고금 기수(氣數)의 후하고 박한 것이 같지 않음을 상상할 수 있으니 슬프다. 이에 참람한 것을 무릅쓰고 책머리에 써서 돌려보낸다. 幸州 奇正鎭 삼가 씀 註:육신(六臣):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학살당한 사육신(死六臣). 기노사(奇蘆沙 一七九八~一八七六):본관은 행주(幸州) 이름은 정진(正鎭) 八∼九세에 이미 경사(經史)에 통했고 진사에 합격한 후 여러 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후에 이조참판이 되었다. 성리학의 육대가중 한 사람. 작설(綽楔):충인 열녀 효자가 난 집안을 표창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정문을 세워주던 특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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